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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성종실록』의 기록

           

          『성종실록』「성종 2년(1471) 11월 28일」조에,

          성종대왕이 황해도 관찰사 이예에게 다음과 같은 교지를 내렸다고 기록되어 있다.

           

          사람들은 단군 등을 모신 삼성당이 본래는 구월산 중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에 있었다고 한다. 후대에 삼성당 아래에 패엽사를 세웠다고 한다.

          그런데 불교가 융성해지자 불교 사찰인 패엽사 위에 삼성당이 있는 것이 마땅치 않다 하여

          패엽사 앞 봉우리로 삼성당을 옮기도록 했다고 한다. 후대에 그것도 마땅치 않다 하여

          또 다시 산기슭으로 옮기어가게 했다고 한다.

           

          삼성당에 하느님(하나님), 환웅천왕, 단군왕검의 삼신을 모시고,

          삼신의 사자를 모시는 사자배향청과 제사에 관련된 일들을 담당하는

          전사청을 세웠다고 한다.

           

          나라에서 향 등의 제물을 보내어 제사를 지내온 지가 오래 되었었다고 한다.

          그 후에 나라에서 제사에 쓸 재화를 보내는 일을 폐지하여 제사를 지내지 아니하였다고 한다.

           

          또 삼성당 가까이에 기우제를 지내는 기우단을 쌓고,

          닭과 돼지를 도살하여 신성한 성소를 더럽히니 삼신께서 싫어하시는

          바가 되어 악병이 일어났다고 한다.

           

          그러니 천왕당과 삼신의 사자를 모시는 사자배향청과 전사청의

          옛 터전들이 아직도 남아 있는지, 신위를 모셔 놓은 원인을 전해 주는 사람이 있는지,

          나라에서 향 등의 제물을 내려 보내 제사를 지내는 예전 예법을 상고할 수 있는지,

          기우제를 지내는 제단인 기우단을 쌓아 놓은 것은 어느 때부터인지, 또 지금도

          이 제단에서 기우제를 지내는지, 닭 돼지를 도살한다는 말이 있는데 과연

          그러한지, 악병이 전에는 없었는데 이로 인하여 악병이 처음으로 일어난

          것인지, 등에 대하여 반드시 옛날부터 민간에 전하여 오는 말들이 있을

          것이다. 그 내용들을 샅샅이 찾아서 악병의 근원을

          상세히 연구하여 아뢰도록 하라.

           

           

          『성종실록』「성종 3년(1472) 2월 6일(3월 15일)」자에,

          황해도 관찰사 이예가 급히 말을 달려와 성종대왕에게 다음과 같이 아뢰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작년 11월에 전하께서 내려주신 유시를 따라서 문화현에 사는 경험이 많고

          옛일들을 잘 아는 노인들을 찾았습니다. 사직(재판관)을 지낸 최지, 전직(궁궐의 전각을 지키는 관직)을

          지낸 최득강 등의 노인을 방문하여 삼성당에 관련된 사적을 얻었습니다. 이를 조목조목 아뢰겠습니다.

           

          (1)

          옛날부터 민간에 전하여 오는 말로는 단군이 구월산에 들어가서

          처음으로 신이 되었다고 합니다. 삼신을 모신 신전과 부속 건물들은 대증산의

          패엽사 서쪽에 임하여 있었답니다. 그런데 후에 패엽사 아래의 작은 산봉우리로

          옮기어 갔다고 합니다. 또다시 소증산으로 옮기어 갔는데, 그곳이 지금의 삼성당 이라고 합니다.

          대증산과 패엽사 아래의 작은 산봉우리에는 지금 삼성당 터가 남아있지 않습니다.

          (삼성당을 옮겨 간지 오래되었기 때문에 그 터가 남아 있지 않게 된 것임 즉.

          즉 삼성당의 옛터가 남아있지 않다는 기록은 삼성당이 옮겨 간지 매우 오래되었다는 것을 증언하는 기록임.)

           

          대증산과 작은 산봉우리에 삼신을 모신 사당과 집들이 있었을 때에

          나라에서 제사에 쓸 재화를 보내어 하느님(하나님), 환웅천왕, 단군왕검의 삼신께

          함께 제사를 지냈는지는 알지 못합니다.

           

          (2)

          단군왕검과 단군왕검의 아버지인 환웅천왕 단군왕검의 할아버지인 하느님(하나님)을

          칭하여 삼성(三聖)이라고 한답니다. 신전과 부속건물을 지어 제사를 모셨답니다. 제사를 폐지한 후부터

          신전과 부속건물들이 기울어지고 무너지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답니다.

          세종 32년(1450)에 현령 신효원이 중창하고 세조 4년(1458)에

          현령 매좌가 단청을 새로 하였다고 합니다.

           

          (3)

          삼성당 안에 하느님(하나님)께서는 남쪽을 바라보고 계시고,

          환웅천왕께서는 서쪽을 바라보고 계시며 단군왕검께서는 동쪽을 바라보고 계시는데,

          널빤지 위에 신위를 새긴 위판으로 나란히 모셔져 있습니다. 민간에 전하여 오는 말로는

          옛날에는 세분 모두 나무를 깎아서 만든 목상으로 모셔져 있었는데 태종대왕 때에 하륜의 건의로

          조정에서 모든 사당(삼성각)의 목상들을 부셔 없애버리라고 하였답니다. 하느님(하나님), 환웅천왕, 단군왕검의

          삼신 목상 또한 부셔버렸다고 합니다.

           

          (4)

          삼성당 서쪽 협실에는 구월산 대왕이 가운데에 있었고,

          좌측에는 토지정신이 었었으며, 우측에는 잘못된 일들을 재판하는

          네 사자들인 사직사자가 있었답니다. 그 위판들은 나란히 남쪽을 향하여 있었습니다.

           

          (5)

          예전에는 전사청이 없었는데 현령 매좌가 삼성당 아래에 초가집 수 칸을 지어

          삼신을 모시는 성직자들을 거주하게 하였습니다. 제사를 지내기 위하여 온 사람들도

          이 전사청에 머무르게 하였고, 제사에 올릴 음식상 또한 전사청에서 차리도록 하였습니다.

           

          (6)

          패엽사 또한 삼성당 서쪽 6리 되는 곳에 있는데

          그 사이에는 고개 하나와 작은 시내 하나가 있습니다.

           

          (7)

          삼성당에서는 금과 은으로 된 제기들만 사용하였는데,

          고려 말기에 왜구가 제기를 약탈해 갔답니다. 그 이후부터는 사기로 된 제기를

          사용하다가 매좌가 유기를 만들어 사용하였습니다.……구월산 중에서 가장 높은 산봉우리는

          천왕봉이 아니라 사왕봉이라고 합니다. 옛날에는 이 사왕봉이 나라에서 향 등의 재화를 내려 보내어

          제사를 지내던 곳인데 태종대왕께서 을미년(1415)에 이를 금지시켰다고 합니다.

          그 삼성당 터전들을 본 사람이 없고, 지금은 얼음이 얼어 위험하여

          산봉우리에 올라갈 수도 없습니다.”

           

          (8)

          삼성당의 단군신위를 평양으로 옮겨간 때부터

          국가에서 제물을 보내어 제사를 지내지는 않았지만,

          날이 몹시 가물어 비를 내려 달라고 기도하는 기우제를 지낼 때나,

          홍수가 져서 비를 그치고 날씨를 맑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기청제를 지낼 때는,

          현령이 조복을 갖추어 입고 친히 삼신께 제사를 지냅니다. 제사에는 흰떡, 백반, 대추,

          포, 닭 등의 폐백과 과실을 사용하였습니다. 삼성당의 삼신께 비를 내려 달라는 기우제,

          비를 그치게 해달라는 기청제와 같은 공익을 위한 제사 외에, 다른 것을 기원하는 제사는

          지내지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 삼성당의 삼신三神은 기도하는 대로 이루어지게 하는

          신기한 영험이 있다고 고을 사람들에게 전해오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정에서 백성들의 출입을 금하였으므로 백성들은 감히 삼성당에 와서 제사를

          지내고 기도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9)

          기우제를 지내는 용단은 삼성당 아래 백여 보에 있으나

          설치한 날짜는 알지 못합니다. 문화현에 소장된 송나라 경덕 3년(서기 1006년) 5월에

          의주(나라의 전례 절차를 적은 책)에 ‘떡, 밥, 술과 흰 거위를 사용하여 제사를 지냈다.’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지금은 흰 거위 대신, 흰 닭을 사용하고, 돼지는 사용하지 않습니다.

           

          (10)

          삼성당 아래 가까운 곳의 마을들에는 사람 사는 집들이 조밀하게 들어차 있었는데,

          삼신께 제사를 지내지 않는 때부터 악한 병이 발병하기 시작하여 사람 사는 집들이

          텅텅 비어 아무도 살지 않습니다.……지금 황해도 문화현 구월산에 있는 삼신 사당에

          종전에는 나라에서 향 등의 제물을 내려 보내어 제사를 모셨었습니다.

          전하께 청하오니 백성들이 제사를 올리고자하는 소원을 들어 주시어,

          평양의 단군왕검 사당에 제사지내는 예에 의하여,

          봄과 가을에 제물과 축문을 내리시어

          제사를 행하게 하십시오.

           

          성종대왕(1470~1495)이 듣고 그대로 따라서 행하게 하였다.

          삼신께 제사를 지내지 아니하여 1438년 3월 19일 이전부터 1772년 3월 15일까지

          44년 이상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간 일이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성종대왕이 즉위하자 즉시 황해도 관찰사 이예에게 삼신과

          삼성당의 일을 상세히 조사하여 보고하라고 어명을 내린다. 또 이예는 삼신과

          삼성당에 관련된 사적을 조사하여 급히 말을 달려 성종대왕에게 보고한다.

          이러한 사실은 황해도 구월산을 중심으로 평안도 남부, 경기도 북부

          지방에 수십 년 동안 계속된 악병이

          얼마나 극심한 것인지 알게 해준다.

           

          성종대왕이 삼신께 제사 지내는 천제를 복원한 후부터

          황해도 구월산을 중심으로 평안도 남부, 경기도 북부 지방에

          창궐하던 악병은 끊어지게 되었다.

           

          또 성종대왕의 교지와 이예의 상소에서 보듯이,

          기도하는 대로 이루어지는 영험함을 가지신 하느님(하나님), 환웅천왕,

          단군왕검의 삼신께 민간인들이 제사하고 기도를 하지 못하도록 금하고 있다.

          이것이 한국고유의 민족종교의 뿌리를 끊는 탄압 중의 한 사례이다.

          이때로부터 근세조선이 멸망할 때까지 도감과 감관 등의 책임자가

          5명의 사당지기와 1명의 산지기 등을 두어 삼성당을 지키게 하고,

          조정에서 관리를 파견하여 제사를 지내왔다.


          그러한 기록들이 『조선왕조실록』의 『선조실록』,『현종실록』,

          『숙종실록』,『영조실록』,『정조실록』등에 기록되어 있다.

          그 기록들을 간단히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4) 『선조실록』의 기록

           

          『선조실록』「선조 30년(1597) 6월 11일」조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예조가 아뢰기를, “예문관에서 삼성사의 축문을 나누어 쓰고,

          단자를 쓸 때에 ‘이른바 전산은 어디에 있는가? 전에 어떻게 하였는지

          기억할 수가 없다. 설사 하더라도 삼성당이라고만 쓰고, 그 이하는 축문 가운데

          넣어야 마땅할 듯하다.’고 전교하셨습니다.”

           

          “『여지승람』을 상고해 보건대 ‘전산은 문화현 북쪽 10리 되는 곳에 있고,

          삼성사 역시 문화현 구월산에 있습니다. 바로 하느님(하나님), 환웅천왕, 단군왕검의 사당입니다.

          봄·가을로 향과 축문을 보내어 제사를 지내는데, 홍수가 나거나 가뭄이 들었을 때

          기도를 하면 영험이 있다.’고 했습니다.”

           

          “본 예조가 황해도의 해오던 전례(典禮)에 의거하여,

          오는 가을부터 시작하여 예에 의해 거행하는 것으로 이미 재가를 받았습니다.

          삼성 즉, 삼신의 위패가 각각 있고, 사적도 같지 않아 축문도 각기 짓는 것이 마땅합니다. 때문에 예문관에서 그처럼 위패를 나눈 것입니다.”

            이에 선조대왕이 전교하기를, “향을 보내도록 하라. 전에 결정할 때는 이런 일이 없었고, 전산에 대한 것도 없었다. 다시 살펴서 하라.” 고 하였다.

           

          『선조실록』「선조 36년(1603) 6월 17일」자에

          다음과 같이 아뢰고 있다.

           

          “백제의 시조 온조왕 사당이 직산에 있습니다.

          임진왜란을 겪은 뒤로는 물질과 인력이 매우 탕갈되었습니다만,

          부서지고 허물어진 사당을 수리 복구하는 전례가 되는 선례를 강구하여

          예관으로 하여금 시행하게 하십시오.”

           

          이어 예조가 아뢰기를, “역대 왕조의 시조 사당에는 봄과 가을의 중간 달에

          중사(中祀)를 차리게 한 것이 사전(祀典)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난리가 일어난 뒤로는

          모든 제사를 미처 거행하지 못했습니다.……삼성사는 지난해에 수리했기 때문에 현재 봄과

          가을에 향과 축을 보내어 제사를 차리고 있습니다. 충청도 직산 땅에 있는 온조전은

          장계대로 충청도에서 형편에 따라 수리하고 제사를 지내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라고 하니 선조대왕이 윤허하는 전교를 내리었다.

           



          5) 『현종실록』의 기록

           

          『현종실록』「현종 1년(1660) 9월 5일」조에

          흥정당에서의 어전회의 기록이 다음과 같이 있다.

           

          “삼성묘 즉, 하느님(하나님), 환웅천왕, 단군왕검의 사당을 개수하는 일은

          황해도 감사의 상소문에 따라 이미 결정했습니다. 그런데 황해도 감사는 예관이 와서

          제사를 지내어 제사의 품격을 높이었으면 합니다.” 하니, 현종대왕이 “예조의 낭관을 보내

          제사를 주관하게 함이 가하다.” 라고 하였다.

           

          그러자 태화가 아뢰기를, “삼신전에 그러한 사유를 아뢴 뒤에

          또 다른 쪽으로 옮겼던 신주를 다시 제자리로 모시는, 환안제를 지내야 하니

          날짜가 많이 걸릴 것 입니다. 예관이 오랫동안 머무르는 것이 염려됩니다.” 라고 하였다.

           

          이에 현종대왕이, “황해도로 하여금 품계가 높은 수령을 특별히 선발하여

          먼저 사유를 고하는 제사를 지내게 하고, 환안제를 지낼 때 예관을 보내 제사를 올리고,

          개수가 잘 되었는지의 여부도 살피게 하는 것이 마땅하다.” 라고 하였다.

           



          6) 『숙종실록』의 기록

           

          『숙종실록』「숙종 21년(1965) 6월 6일」조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예조에서 황해도 삼성사에 있는 단군의 축문을 평양 단군사의

          예에 의거하여 ‘전조선 단군’이라 쓸 것……등을 청하니, 숙종대왕이 윤허하였다.

           



          7) 『영조실록』의 기록

           

          『영조실록』「영조 41년(1765) 12월 8일」조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예조 판서 심수가 영조대왕에게 아뢰기를,

          “황해도 구월산 삼성묘의 위판位版이 많이 훼손되었으니,

          마땅히 개조해야 합니다.”라고 하니 영조대왕이 부제학 서명응을 불러 삼신의 고적을 물었다.

          서명응이 대답하여 아뢰기를, “삼성은 곧 하느님(하나님), 환웅천왕, 단군왕검이시며, 역사에서 말하는

          아사달산이 곧 지금의 구월산입니다.”라고 하면서 그 고사를 아주 상세하게 아뢰었다.

           

          영조대왕이 듣고 말하기를, “그렇다면 환웅은 곧 단군의 아버지이고,

          하느님(하나님)은 곧 단군의 할아버지이다.” 라고 하였다. 그러자 서명응이 또 아뢰기를,

          “고구려 동명왕이 개국한 것이 을유년이었고, 지금 또 삼성묘의 일이 있으니,

          마땅히 재물을 보내시어 제사를 지내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영조대왕이 말하기를, “올해를 넘길 수는 없다.”라고 하였다.

          이어서 동명왕묘의 제문을 몸소 짓고, 향과 축문을 보내고, 삼성묘의 토판을

          나무로 독(신주 궤)을 만들어 덮으라 명하고, 독(櫝)을 만드는 설계도를 몸소 그려서

          예조참의 홍낙인을 보내어 바로잡으라고 하였다.

           


          8) 『정조실록』의 기록

           

          『정조실록』「5년(1781) 11월 28일」조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정조대왕이 하교하기를, “마침 고사를 읽다가 구월산의 삼성사를 중수할 때

          전조께서 내리신 전교를 받들어 보았다. 그때 예조의 당산관이 어명으로 삼성사를 보살피고,

          삼성사의 개축 여부에 대해 황해도 감사로 하여금 문화현에 문의하여 상세한 장계를 올리게

          하였었다.……향과 축문을 보내어 날짜를 가려서 제사를 지낸 뒤에 장계를 올리도록 하라.”

          라고 하였다.

           

          또『정조실록』「13년(1789) 6월 6일」조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삼성사를 개수하고 제사 의식을 개정하였다. 삼성사는 하느님(하나님), 환웅천왕,

          단군왕검을 제사하는 사당으로 문화현 구월산에 있다. 황해도에 명하여 삼성사를

          보살펴 개수하게 하고, 정조대왕이 친히 제문을 지어 근신을 보내 제사 지냈다.

           

          정조대왕이 전교하기를, “문화현의 삼신 사당에 제사의식에서

          미비한 것을 조사하여  감사로 하여금 장계로 보고하게 하라.” 하였다.

           

          황해감사 이홍재가 삼성사의 제사 품목과 제사 의식을 조사하여 아뢰었다.

           

          정조대왕이 다음과 같이 전교하였다.

           

          “역대 시조의 사당에는 10변(籩:신위 왼편에 과일 마른 음식 등을 담아 놓는 굽이 높은 제기),

          10두(豆:뚜껑이 있어서 고기붙이, 국 따위를 담는 데 쓰는 굽이 높은 제기)를 사용하고, 12변과 12두는

          종묘와 사직 제사에만 사용하는데, 유독 삼신 사당에만 12변과 12두를 사용하여 종묘와 사직의 예에 따라

          사용하고 있다.……현행 진설 도식이 도리어 옛 도식만 못한 것은 무슨 곡절에서인가? 헌관을 지방관으로 하고

          지방관의 유고시에는 향임이 대행한다고 되어 있다. 전사(제사를 관장하는 칙임 관리)와 대축(제사에 축문을 읽는 관리)을 첨사, 만호 등의 변장으로 하는 것도 매우 타당치 않다. 사당을 지키는 사람들은 그 사람됨과 처지가

          어떠하며 종이나 하인 등 감독하여 보살피는 무리는 있는가? 이미 사당의 의식이 이처럼

          엉성하다는 것을 들은 이상 어찌 무턱대고 내려오는 관습대로만 할 수 있겠는가.

          공문을 황해도로 보내어 정확한 상황을 묻고 여러 신하들에게 문의하라.”

           

          이에 황해도 감사가 다음과 같이 아뢰었다.

           

          “……흑단령을(흑단령(黑團領) 벼슬아치가 입던 검은색의 단령.

          당상관은 무늬가 있는 검은 비단(紗)을, 당하관은 무늬가 없는 비단(紗)를 썼다.) 입은 것도

          몇 년이 되었는지 알 수 없습니다.……계절마다 지내는 제사 때마다 헌관을 으레 지방관을 선발하여

          맡기고, 전사, 대축, 도예차를 첨사, 만호, 별장 중에서 차정합니다. 지방관이 공석일 경우이면 겸임 관리가

          헌관이 되고, 지방관이 있으나 유고할 경우이면 전사 겸 대축이 헌관으로 오르고 도예차가 전사 겸 대축으로

          오르니, 좌수 별감 등의 향임이 대행한 적은 없습니다. 모든 집사는 생원ㆍ진사 중에서 선발하여 맡깁니다.……사당을

          지키는 사람으로는 도감과 감관이 있고, 하인으로는 사당지기와 산지기 등이 있습니다.

          절향 때 전사 겸 대축을 찰방으로 선발하지 않는 것은 사신의 행차가 끊이지

          않으므로 세 역의 찰방을 여기저기 나누어 파견할 겨를이 없기 때문입니다.”

           

          또 우의정 채제공이 다음과 같이 아뢰었다.

           

          “종묘와 사직 제사에는 변ㆍ두의 수를 각기 12로 하고,

          역대 제왕들의 사당에는 10만 씁니다.……헌관을 첨사, 만호 등의

          변장으로 대체하는 것은 엉성하고 구차합니다. 헌관은 반드시 본 고을의

          현령으로 차정하고 전사 겸 대축은 반드시 찰방으로 차정해야 합니다. 현령과

          찰방이 모두 유고시에는 원근을 막론하고 도내의 수령으로 대신 차정해야 합니다.

          삼성사를 지키는 도감ㆍ감관은 모두 그 고을의 선비 중에서 엄선하여 선택하고,

          사당지기 5명과 산지기 1명에게도 모두 역을 지우지 말아 삼성사를

          수호하는데 온 마음을 다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이에 정조대왕이 다음과 같이 전교하였다.

           

          “본 삼성사의 대외적 체면이 각별하니

          제사가 격식에 맞지 않으면 제사지내지 않은 것과 같다는 탄식이 있을 것이다.

          지난번에 허가한 것도 실로 이런 마음에서 연유한 것이었다. 변ㆍ두의 가짓수 중에

          전에 없던 것이 지금에 있는 것에 대해서는 반포한 조령이 없었으니 속히 옛 제도로 돌아가라.

          토산물로 바꾸어 쓰는 것도 편의에 따르도록 허락하겠다. 희생에 관한 일은 증거할 만한 문적은

          없으나 예의에는 전거가 있다. 축문 서식과 홀기에 쓴 것이 호인지 이름인지 분간해 알기 어려우니,

          이 두 조항은 모두 예전대로 하는 것이 무방하다. 제복 대신 임시방편으로 흑단령을

          입는 것은 마음대로 결정한 데 가까우니 황해도에 신칙해서 새로 제복을

          마련하고 또 떨어진 것은 수리하게 하라.”

           

          (좀 더 자세히 아시고 싶은 분은 김종서 박사님의 『한국사 교과서 바로 잡기 1000장면』, 『잃어버린 한국의 고유문화』, 『고조선과 한사군의 실제위치를 찾아서』, 『신시ㆍ단군조선사 연구』, 『두 눈으로 본 성서의 진실』, 『대학 강의 노트』 등을 참고 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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